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미국)|제1해병사단]] ([[올리버 스미스]] 소장) ===== 하갈우리 주둔. "토종(Old Breed)"이라는 사단명으로 유명한 [[미 해병대]]의 첫 번째 사단으로 1941년 창설되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과달카날 전투]], [[글로세스터 곶 전투]], [[펠렐리우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 4번의 전투에 참여한 역전의 부대이다. 1950년은 사단 창설 9년째에 접어드는 시기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단은 기간요원 5천 명만 둔 평시 감편 체계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한국전 당시에는 전국의 해병대 현역병을 다 끌어 모아도 인원이 부족했다. 할 수 없이 병력의 절반 정도는 평소 연간 30일만 복무하는 파트타임 민병인 해병대 '비상근예비역'[* 미국의 비상근예비역은 우리나라와 달리 현역 복무를 하지 않고 민간에서 바로 비상근예비역으로 복무하며, 연간 30일씩 10년을 복무하고, 복무기간 중 24개월까지 전시동원 소집이 될 수 있다. 5년 전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소집된 비상근예비역의 50%는 실전 경험이 있었고, 실전 경험이 있는 비상근예비역 위주로 파병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파병된 비상근예비역의 77%는 [[2차대전]] 참전 경험이 있었다.]에서 보충을 받아, 전시 완편 2만 3천 명을 채울 수 있었다. 중대장급 이상의 장교는 90% 가량이 실전 경험이 있었고, 분대장급 이상 부사관은 60% 가량, 사격조장급인 일병, 상병은 10% 가량이 실전 경험이 있었다. 5연대, 1연대, 7연대 순으로 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는데, 5연대는 현역병으로 구성되어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고, 나중으로 갈수록 병력이 부족하여 7연대는 현역이 50% 비상근예비역이 50% 정도였다. 이중에서 가장 먼저 편성된 5연대는 에드워드 A. 크레이즈 준장을 여단장 삼아 제 1해병임시여단으로 편성되어 [[낙동강 전선|낙동강 전투]]를 치렀다. 여단 4,725명 중 전사자 903명 발생, 전체 여단 병력 기준으로 약 20% 정도 인명손실이 있었다. 지원병력을 제외하고 1여단의 전투병력인 5연대만 따지면 손실은 더더욱 크다. 5연대 내 소총소대장 18명 중 15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교체된 소대장 중에도 2명이 부상으로 후송됐다. 18개 소대장 보직에서 1달 사이 전사상자가 18명 발생한 것이다. 또한, 5연대 내 6개 소총중대장 중 5명이 1달 사이에 부상을 입었다. 교체된 중대장 중에도 부상자 1명이 추가로 발생했다. 6개 소총중대장 보직에서 부상자 6명이 생긴 것이다. 이후 1연대가 도착하자 여단 편제를 해체하고 해병1사단을 구성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펼친다. 마지막으로 7연대가 도착하자 비로서 완편된 상태로 [[9.28 서울 수복]] 전투를 치룰수 있었다. 1달간의 인천-서울 전투에서 미 해병대 제1사단의 병력손실은 2,430명으로 이중 전사자는 414명이었다. 사단 전체를 기준으로 약 9.6% 정도의 인명손실이 있었다. 그러니 미해병1사단은 한국전에서도 충분한 전투경험을 갖고 있었다.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장을 거치는 등 다수의 보직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막판에는 미 해병대 제1사단 부사단장과 [[미 육군]] 제10야전군 부참모장을 거쳐 미 해병학교장으로 재직 중 종전을 맞이했다. 온화하고 종교적인 성향 탓에 별명이 '교수'였다. 장진호 전투 당시 부사단장은 에드워드 A. 크레이즈 준장, 참모장은 그레곤 A. 윌리엄스 대령이다. [[한국전쟁]] 당시 제1해병사단의 병력은 25,323명이었으며, 여기에 [[한국 육군]] 통역 110명과 대한민국 경찰 화랑부대 1개 중대가 배속되어 있었고(장진호 전투에는 1개 소대만 참가), 미 육군과 달리 미 해병대에는 편제표상 한국인 [[카투사]]는 없었다.[* 다만, 장진호 전투 기간에는 미 육군 병력과 함께 철수했기 때문에 미 육군에 배속된 한국군 [[카투사]]를 미 해병대가 직접 작전 통제한 경우는 있었다.] 여기에 별도로 미 해병대 제1사단을 직접 지원하는 미 해병항공단과 해병군수단이 도합 약 1만명 가량 된다. 즉 병력 면에서는 장진호의 미 해병대 2만 5천 + 미 육군 4천 5백 + 영국 해병코만도 300명 = 유엔군 총 3만명으로, 중공군(제9병단 기준) 12만명과 4배 정도 차이가 났다.[* 다만 어떻게 계산한 것인지는 이해는 안 가지만,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홍쉐즈가 쓴 《항미원조전쟁을 회억하며》를 보면 '미군은 전투병 1명을 보급병 7명이 지원하지만, 중공군은 보급병 1명이 전투병 25명을 지원한다'고 되어 있다. 계산이야 어쨌든 중공군은 죄다 알보병이라는 것을 자조하는 것이다. 반면에 미군은 어마어마한 기갑, 포병, 보급, 운전병이 있었으니 일선의 소총수는 중공군보다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일선의 미군 소총수들이 중공군을 대군으로 느낀 것은 충분히 이해 가는 부분이다.] * 해병7연대 (호머 L. 리첸버그 Jr. 대령) – 장진호 서안 유담리 주둔. * 1대대 (레이몬드 데이비스 중령) – 보급선 방어[* A중대 유담리 남쪽 방어, C중대 1소대 그 아래 위치한 연대통합지휘소 방어, B중대 그 아래 방어, 5 km 남쪽으로 내려가 감편, C중대 일명 '터키힐' 방어.] * 2대대 (랜돌프 록우드 중령) – 2개 중대 유담리 동쪽 방어, F중대 보급선 방어[* D, E중대만 먼저 도착하여 임시로 1대대장이 지휘하게 된다. 본부중대와 화기중대는 아직 하갈우리까지밖에 못 왔고, 이후 F중대는 주보급로를 방어하기 위해 유담리 남쪽 12 km 지점에 있는 신흥리 남쪽 덕동고개, 일명 '폭스힐'을 방어하게 된다.] * 3대대 (윌리엄 해리스 중령[* 해병1항공단장 필드 해리스 소장의 아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고생했는데, 이 때문인지 27일 정신이상 행동을 하였다. 그날 밤 사단 최북단에 있는 3대대 H중대부터 뚫렸고 너무 쉽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전투 후반 실종되었다. 이 전투 당시 만 32세였고 슬하에는 2녀가 있었다. [[http://www.kentuckymarines.org/index.cfm/legends/william-f-harris/|#]]]) – 5연대 2대대의 양 측면 엄호 * 해병5연대 (레이몬드 L. 머레이 중령) – 장진호 서안 유담리 주둔 * 1대대 (존 스티븐슨 중령) – 유담리 역 남쪽 주둔 예비대 * 2대대 (해롤드 로이스 중령) – 유담리에서 서쪽 낭림산맥을 향해 진격 중 * 3대대 (로버트 태플릿 중령) – 유담리 역 북쪽 주둔 * 해병1연대 ([[루이스 풀러]] 대령) 하갈우리 남쪽 고토리 주둔 * 1대대 (도널드 슈먹 중령) – 고토리 남쪽 진흥리 주둔 * 2대대 (앨런 서터 중령) – 고토리 주둔 * 3대대 (토마스 리지 중령) – 하갈우리 주둔[* 2개 중대만 하갈우리에 있었고 G중대는 고토리 주둔.] * 해병11연대(포병연대) (칼 영데일 대령)[* 전투 막바지에는 보병부대의 병력손실이 극심해서, 각 포대별로 1/3을 차출하여 1개 보병소대로 재편 후 각 보병연대에 보충 병력으로 보내야 했다.] * 1대대 (105mm) -하비 피한 중령 (5연대전투단 배속) * 2대대 (105mm) -메릿 애들먼 중령 (1연대전투단 배속) * 3대대 (105mm) -프란시스 페리 중령 (7연대 전투단 배속) * 4대대 (155mm) -윌리엄 맥 레이놀즈 소령 (1, 5, 7연대 전투단에 각 1개 포대씩 배속) 일반적인 전시 증원 해병사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소총분대 13명 = 분대장 + 사격팀(소총수 3명+[[M1918 브라우닝]] 사수 1명) 3개 * 소총소대 44명 = 소대본부 4명(소대장, 부소대장, 전령, 무전병), 소총분대 3개(+해군의무병 1명) * 화기소대 = 본부, 박격포반(60밀리 M2 박격포 3문), 기관총소대(30구경 M1919A4 경기관총 6정) * 소총중대 180명 = 중대본부(중대장, 부중대장, 행정보급관, 계원, 전령, 무전병), 소총소대 3개, 화기소대 (+해군의무병 7명) * 화기중대 = 박격포소대(81mm M1 박격포 4문), 2개 중기관총소대(30구경 M1917A1 기관총 4정), 돌격소대(3.5인치 바주카 18문) * 해병대대 1,123명 = 대대본부(대대장, 참모 5명, 주임원사, 담당관 15명 포함), 본부중대, 소총중대 3개, 화기중대 * 해병연대 3,902명 = 연대 사령부(연대장, 과장 5명, 실무장교 7명, 주임원사, 담당관 20명 포함), 본부지원중대(281명), 해병대대 3개, 박격포 중대(M2 박격포 12문, 140명), 대전차중대(M20 무반동포 12문, M26 전차 5대, 112명)[* 해병대는 육군과 달리 화기중대가 별도로 편제되어 있지 않고 대대본부에 소속되었다.] * 포병대대 = 본부, 지원대, 포대 3개(각 6문) * 포병연대 3,108명 = 3개 105mm 곡사포대대, 2개 155mm 곡사포대대, 제1로켓포 대대 C포대(4.5인치 24연장 T66E2 로켓포 12문) * 해병사단 22,343명 = 해병보병연대 3개, 포병연대 1개, 본부대대, 군수지원대대, 통신대대, 자동차수송대대, 병기대대, 의무대대, 전차대대, 근무지원대대, 공병대대. * 해병본부대대 923명(사단본부 및 대대본부중대 656명, 해병헌병중대 140명, 해병수색중대 127명) - 사단 사령부(참모부(사단장, 참모장, 참모 8명, 과장 20명, 실무장교 65명, 전속부관, 주임원사, 담당관 16명 포함.), 본부중대(의무대, 계원소대, 경비중대 포함) * 해병군수지원대대(Serv. Bn) 827명 * 해병통신대대 960명 * 해병수송대대 783명 * 해병병기대대 558명 * 해병의무대대 755명 * 해병전차대대 907명= 본부중대, 지원중대, 3개 전차중대(중대당 M26 퍼싱 전차 15대+ 예비 차량) * 해병근무지원대대(SP Bn) 755명 * 해병공병대대 1,180명 해병대 소총중대는 알파벳 기호를 붙였는데, 1대대 소총중대는 각각 A~C중대, 2대대 소총중대는 D~F중대 식이었으며, 화기 중대는 그냥 1대대 화기중대로 불렸다.[* 현대의 [[미 해병대]]는 화기중대에도 알파벳 기호를 부여 한다. 즉 1대대는 A~D중대로 구성된다.] 5, 7연대+각종 지원부대를 합쳐 해병대 약 8,200명이 유담리 일대에 주둔 중이었다. 장진호에 있는 5, 7연대를 부사단장 에드워드 크레그 준장이 통합 지휘하다가 아버지 임종으로 27일 오후 [[미국]] [[텍사스]]로 출국한 상태였고, 양 연대 병력이 중대 단위로 워낙 뒤섞여 있어서 장진호의 해병대는 연대전투단(RCT) 체계로 운용된다. 북한 72번 도로를 따라[* 폭 12발자국의 꼬불꼬불한 험한 도로로 미군은 주보급로 MSR: Main Supply Route라고 칭함.] 남쪽 5 km 지점 '터키힐'에 7연대 C중대 180명,[* 1개 소대는 연대본부 경비를 위해 차출되어 감편된 상태.] 그 남쪽 7 km 지점 '폭스힐'에 7연대 F중대 246명[* 대대 화기중대 등으로 보강된 상태.](해병 234명, 해군의무병 12명+한국 육군 통역장교 1명), 다시 남쪽 11 km 하갈우리에 3천 명(사단사령부와 1연대 3대대 H·I중대, 포병대 등)이 주둔 중이었고, 또 다시 남쪽 18 km를 내려간 고토리에도 해병 1,500명(해병 1연대 2대대, 3대대 G중대, 전차대대 D중대), 황초령을 넘어 남쪽 진흥리에 해병 1,600명(해병 1연대 1대대) 가량이 주둔 중이었다. 그 중에서 반절은 비전투병력들이기는 하지만, '모든 해병은 소총수(Every Marine is a rifleman)'라는 개념하에 기본적으로 보병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 비전투병력들은 장진호 전투 최후의 순간에 소총을 잡고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 현대 한국군에서도 가끔 나오는 ‘미군은 비전투병력도 싸웠다’는 일화가 바로 이때의 상황이다. * 제1해병항공단 (필드 해리스 소장) 제1해병군수단과 합쳐서 1만 명. 해병항공단은 [[F4U 콜세어]]를 이용하여 해병대와 육군을 근접항공지원하였다. * 제1해병군수단 (J. S. 쿡 대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